2018. 3. 7. 12:37ㆍ● 귀촌
"지금 텃밭에 뭘 심고 있긴 한데, 이걸로 돈 버는 건 택도 없어요. 그냥 흉내만 내는 정도고 사실 돈은 계속 해오던 번역 일을 하면서 벌죠. 일단은 반만 농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현성, 35세, 경북 상주)
반농반X. 전업 농부가 아닌 농업과 다른 직업을 병행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말한다. 농촌으로 간 청년들이 흔히 사는 방식이다. 청년들이 실제로 농업에 종사할 수 있기까지 장벽이 많은 데다, 꼭 농사만이 아닌 다양한 삶의 욕구를 가지고 농촌 지역으로 이주해오는 경우 역시 많기 때문이다.
경북 상주로 옮겨간 김현성 씨는 집 앞 텃밭에 배추 등을 심었고, 일부는 내다팔기도 했다. 하지만 농부가 그의 유일한 직업은 아니다. 그의 주된 직업은 외국어 번역 일이다. 프리랜서로 일감을 받아서 생계를 꾸린다.
전북 지역으로 이주한 이향숙 씨는 최근 읍내에 있는 학교에 보조 교사 일자리를 구했다. 처음 이주할 때는 되도록 읍내가 아닌 작은 마을 단위에서 일을 할 수 있길 바랐지만 그게 여의치 않아 매일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 대신 때때로 마을 농사일을 도우면서 흙을 만진다. 그래도 도시에 살 때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있고, 원하던 시골 생활도 즐길 수 있어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다.
20년 전, 이전 세대 귀농인들은 농업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농사를 지어서 돈을 벌고 농업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귀농하는 케이스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대 청년들이 농사와 관계 맺는 방식은 이전에 비해 훨씬 다양해졌다.
실제 귀농귀촌한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농사와 다른 일을 함께’ 하고 있다는 응답이 60.5%로 높게 나타났다. 농사만으로 경제활동을 한다는 응답은 13.2%에 불과했다. 농사 형태에서도 ‘농사로 소득을 얻기 위한 정도’는 38.1%로 나타났다.
청년들이 '반농반X'를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농사만 지으면서 먹고살기란 힘들 것이란 인식이 크다. 농지 확보부터 높은 진입장벽이 존재한다. 귀농 희망자들은 상대적으로 귀농 인구가 많은 지역을 선호하게 되는데, 이런 지역은 땅값이 이미 많이 올라버린 경우가 많아 자금이 부족한 청년들이 농지를 확보하기 쉽지 않다.
“초기 자본이 부족해서 농협의 대출도 알아봤는데 대출 한도도 낮고, 또 실질적으로 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그 조건도 까다롭습니다. 초기 자본이 없는 청년들에게는 아주 어려운 조건들입니다. (강진호, 31세, 충북 청주)
"내가 귀농했던 당시는 논농사가 기본이었습니다. 그 당시엔 비용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하우스 등 농사 규모가 커져서 비용 투자가 상당합니다. 현재로서는 농사지어서 평생 빚 갚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박기수, 1980년대 후반 귀농, 충북 진천)
"처음부터 농사만을 생각하고 내려오진 않았어요. 농촌에 거주지를 놓고 다른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하고 왔어요. 저는 서울에서 나고 자라서 여기에 터전도 없고, 농사 기술도 없기 때문에 제가 농사로 먹고살기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이향숙, 35세, 전북 고창)
청년들을 받아들이는 농촌 역시 상황이 바뀌었다. 예전과 달리 품앗이보다는 고용 용역에 의존한다. 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농사를 배우고 농민으로 성장하는 게 어려워졌다. 90년대 초반 횡성으로 귀농한 구현석 씨는 "나는 모판 날라 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농사를 배울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이런 상황은 토착 주민과 청년 귀농인들 사이에 갈등을 빚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토착민들은 농사를 짓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다보니 청년들이 농사일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는다거나 논다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청년들도 토착 주민들과의 공감대 형성에 어려움을 겪거나 마을 분위기에 쉽게 젖어 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농사와 비슷한 일을 해야지 농촌 정서를 알고 농촌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압니다. 농사를 안 지으면 대화가 단절되고, 농민 정서, 계절적 흐름을 모릅니다. 예를 들어서 지역마다 농번기가 다르고 장수 같은 경우엔 사과철에 일손을 매우 필요로 하는데, 그 때 그런 걸 모르고 다른 일을 벌이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구자인, 귀농귀촌 멘토)
“농사지을 줄 모르면 의도치 않은 텃세 같은 걸 스스로 느끼게 돼요. 소외감 같은 건데, 그걸 텃세처럼 받아들이게 된다는 거예요. 공동의 작업을 하는 그 시기에 나 혼자 놀고 있으면, 어찌됐건 어우러지지 못하는 거고, (사람들은) 그런 상태를 편안한 시선으로만 보지도 못해요.” (이창익, 36세, 충북 괴산)
귀농한 청년들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다. 농사에 '올인'하기 어려운 상황인 데다 또 그러고 싶지도 않은데, 이 같은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토착 주민들이나 이전 세대 귀농인들과 거리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한 귀농 청년은 "(지역에) 오래 사신 분들은 여기에서 다른 일들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는 분들이 많지는 않다"고 했다.
청년이 농촌과 관계맺는 방식이 예전에 비해 다양해진 만큼 이제는 상황을 달리 볼 필요가 있다. 농촌에 오면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시각이 청년들에게는 유연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13년 전에 남원으로 귀촌한 조양호 씨는 "자급자족의 농사를 하면서 두 세 가지의 직업을 함께 갖는 게 생존과 지속의 필요에 따른 것이기도 하고 귀농자들의 성향과도 잘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꼭 농사냐, 농사가 아니냐를 구분지어 보는 시각은 그래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청년들은 농촌과 농사의 가치에 매력을 느껴 농촌으로 내려온 경우가 많다. 직접 소득을 위한 농사를 짓진 않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농촌의 삶과 경제 활동을 이해하려는 준비는 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농'의 가치는 농사를 짓는다고 저절로 체득되는 것이 아니듯, 거꾸로 농사를 직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농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반농반X'의 삶이 대표적이다.
"사실 저희 (청년농업인연합회) 회원 모두가 직접 농사를 짓는 사람은 아니에요. 농업이란 키워드로 묶여있긴 하지만요. 대신 농업 관련 코디네이터도 있고, 디자이너도 있어요. 유통을 하는 청년도 있고요. 그래서 내가 보는 세상 자체가 넓어지죠." (강선아 청년농업인연합회장, 2세 농부, 전남 보성)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농적 가치에 관심을 둔 청년들에게 우리 농촌은 어떤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을까. (3편에서 계속)
참고: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등 7곳 '농촌으로 이주하는 청년층의 현실과 과제' 대산농촌문화 '청년이 농촌에 정착하려면'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귀농귀촌 인구 증가와 시사점'
FARM 에디터 고은이
nong-up@naver.com
더농부
<농촌으로 간 청년을 말하다>
(1) 왜 2030 청년들은 살아온 도시를 떠날까
(2) '반농반x'? 농사에 올인하지 않는 청년들
(3) 청년들의 농촌살이(상): 어디에 살까
(4) 청년들의 농촌살이(하): 뭐하고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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